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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상칼럼

기사입력 2020.12.23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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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세대

    국립합창단

    뉴욕주립대 박사

    코랄챔버 상임지휘자

     

     

    붓 한 자루의 행복

     

    모드(Maud Dowly Lewis 1903~1970)는 캐나다의 민속화가다. 그녀는 마구를 제작하는 장인이자 대장장이인 아버지와 미술과 음악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어머니 사이에 1남 1녀의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았으나 그녀는 14 세 되는 해에 다니던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선천성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인해 정상적인 걸음을 걸을 수 없었고 말도 어눌하였으며 턱이 가슴에 거의 붙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모습은 언제나 다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모드의 손가락이 비틀어지기 전까지 모드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물감으로 크리스마스카드를 함께 그려 판매하는 등 비록 신체적인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모드의 성장기에 행복한 기억을 남겨주었다. 하지만 모드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35살 때 든든한 기둥 같았던 아버지가 죽고 두 해 뒤 자애로웠던 엄마마저 세상을 떠나자 거친 광야에 홀로 버려진 아이처럼 모드의 삶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부모가 남겨준 집에서 오빠와 잠시 살다 모드는 근처에 사는 고모의 집으로 들어간다. 오빠에게 모드는 부담스런 짐 같은 존재였으므로 고모에게 약간의 보수를 지불하고는 훗날 모드의 동의 없이 집마저 팔아버린다. 고모 역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림만 그리는 모드가 달가울 리가 없다. 관절염은 점점 모드의 몸을 괴롭혔고 세상의 어느 누구도 모드를 거들떠보거나 사랑하지 않는 외로운 삶 가운데서 모드는 과감하게 독립을 하기로 결심한다.

     

    에버렛(Everett Lewis 1893~1979)은 물고기를 잡아 팔기도 하고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일을 해야만 하는 44살 노총각이다. 죽어라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보육원 출신이라 성격도 원만치 않은데다 인색했던 그는 지역마켓에 가정부를 구하는 광고를 낸다. 일이 너무 많아 자기가 사는 작은 오두막조차 건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조건은 숙식 제공과 자신의 청소도구를 지참할 것. 모드는 그 집으로 찾아간다.

     

    사고무친의 가난한 노총각과 장애로 인해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 힘든 34살 노처녀, 사회의 가장 밑바닥 인생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살아야 하는 집은 6평 남짓의 작은 오두막이었는데 거실 겸 부엌으로 일 층을 썼고 잠은 다락에서 자야했다. 둘은 만난 지 몇 주 후에 결혼한다. 에버렛은 바깥일을 했고 모드는 불편한 몸으로 집안일을 했다. 둘은 그 작은 오두막에서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모드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가지고 온 화구를 꺼내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은 골판지나 널빤지에 그림을 그렸고 선반이나 창문에도 그림을 그렸다. 밝은 기운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작은 오두막이 화사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온 집안이 모드의 그림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좁디좁은 오두막에서 모드는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모드의 그림은 동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에버렛을 따라다니며 생선을 팔았는데 25센트에 크리스마스 카드도 함께 팔았다. 그 카드가 점점 인기가 높아지자 에버렛은 처음으로 유화를 그릴 수 있는 도구를 사주며 모드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관절염으로 인해 큰 그림은 그릴 수 없었지만 모드의 그림은 점점 유명해졌다. 모드의 그림은 그녀만의 독특한 화풍을 표현했다. 주로 밝고 화사한 색을 사용하였으며 주제는 주로 동물들이나 꽃 혹은 새나 마차 등등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고 즐거운 느낌을 주는 것들이다. 모드는 색을 섞지 않고 원색을 사용하였으며 그녀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행복했던 기억을 되살려 그림으로 표현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작은 오두막은 명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모드의 그림을 사려고 방문했다. 모드는 그림을 비싸게 받지 않았으며 가장 비싸게 받았을 때가 말년에 10달러였다고 한다. 모드는 점점 유명해져 전국적인 티비 방송에 나오게 되었고 닉슨 대통령 재임 시 백악관에서 두 점을 샀을 정도였다.

     

    모드는 20세기에 캐나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그림은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아 어느 누구의 화풍과도 차별이 되는 독특한 것이었다. 모드가 죽은 후 그녀의 그림은 옥션에서 수 만 불을 호가하는 가격에 팔렸다. 그녀가 살던 오두막은 그녀가 살던 곳에 그대로 잘 보존되어 지금도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고 한다.

     

    뼈 마디마디에 옹이가 생기고 비틀리는 고통 가운데서도 모드는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모드의 삶을 지탱해주고 모든 육체적인 고통을 견딜 뿐만 아니라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행복을 가져다 준 것 아니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처해진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다. 모드는 말했다. “나에게는 붓 한 자루와 저 창문만 있으면 됐어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모드는 모델처럼 늘씬하지도 않고 말도 심하게 더듬었으며 가난했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만큼 보잘 것 없는 외모였으나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충만한 사랑으로 반짝였고 그것으로 인해 표현된 작품은 많은 이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으니 어찌 그녀를 진정으로 아름답다 하지 않을 손가. 사진으로 보는 만년의 그녀는 정말이지 너무나 천진하여 마치 어린 아이를 보는 듯 내 마음이 아무런 저항 없이 무장 해제되는 느낌이었다. 67세를 일기로 모드는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갔다.

     

    2016년 그녀의 일생을 스크린으로 재현한 영화 ‘내 사랑(Maudi, my love)’이 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로 연말연시에 온 가족이 함께 보면 좋을 영화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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