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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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송현상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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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립합창단. 

뉴욕주립대 박사.

챔버코랄 상임지휘자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람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평등의 가치 그 자체는 한 번도 외면당한 적이 없다. 평등은 박해당하기는 하였으나 부인당한 적은 없다. 비록 우리나라에서 소위 권력과 재물을 압도적으로 많이 차지한 이들이 가난한 인민을 개돼지 취급을 할지언정 겉으로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며 맘에도 없는 소리 나마 지껄이기는 한다.

 

자본주의자들이 ‘평등의 확산’에 공포를 품었던 것도 실은 다 평등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반응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평등은 오로지 제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의 구가만을 뜻하거나 일 인 일 표로 구체화 되는 정치적 평등만을 의미할 뿐 기회의 균등이나 경제적 평등은 애당초 고려사항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평등을 허용하는 폭을 극단적으로 좁혀서건 또는 그것도 안 되면 신자유주의에 복무하는 기독교가 말하듯 저 먼 천국의 복락 속으로 평등의 완성을 기약 없이 미루어 놓든지 간에, 우리 인간은 평등에 대한 열망을 잠시도 게을리 한 적이 없다. 어떻게 보면 세계사는 평등의 확장사라 이름 붙일 수 있을지 모른다.

 

평등의 가장 큰 적은 자유였다. 한국사회에서 평등의 확장을 주장하면 가차 없이 빨갱이로 모는 주체는 모두가 자유주의를 극도로 신봉하는 부류이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이 몰락하자 사람들은 그것을 자유주의의 승리로 간주하고 자유를 일단 절대적 가치로 붙박아 놓은 상태에서 평등에 대해 어느 정도의 관용을 베풀 것이냐 하는 쪽으로 논의의 흐름을 잡아가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동구공산권의 몰락이 미국식 자본주의의 승리를 뜻하는 것인가에는 꼭 그렇다고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개인이나 기업의 무한 자유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세계의 빈부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고 그에 따른 자본주의의 몰락은 이제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 되었다. 재화와 생산력의 막대한 증가와 자동화에 따른 인간 소외는 더 이상 방치하다가는 인류가 공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곧 무한한 자유를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몰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세계의 경제를 손 안에 넣고 쥐락펴락하는 거대 다국적기업들과 은행자본가들은 이 세계를 새로운 봉건주의로 바꾸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힘을 키워가는 중이다. 그들은 한 나라의 정권을 무너뜨리기도 하며 자기들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흔적도 없이 제거해 버릴수 있는 힘과 법과 제도를 틀어쥐고 있다.

 

그들에게 가장 좋은 자양분은 인간의 탐욕을 바탕으로 한 이기심이며 그것의 확장을 극대화한 결과 원자화된 개인의 사적 이익이 공동체의 공공이익 위에 군림하는 현실이 만들어졌다.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궁극적 가치의 고갱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전 세계의 인민을 돈으로 조정 가능한 노예로 만들어 그들의 왕국을 영속시키려 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 천문학적인 돈을 착복하거나 거대 재벌이 막강한 금력으로 정치권력까지 제 수하처럼 부리며 불법을 자행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한편 지하 단칸방에서 월세를 내지 못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온 가족이 자살을 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는 곳이 자본을 신으로 섬기는 신자유주의의 나라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그들은 언론을 장악하여 신자유주의의 정당성을 인민에게 주입하고 애국과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그들로 하여금 끊이지 않는 노예생활을 수용하도록 하고 있다.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나타내는 세 단어는 자유, 평등, 박애다. 자유와 평등은 서로 완전하게 합의를 이룰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늘 긴장관계에 있으며 법이나 시스템으로 구체화시키지 않을 수 없는데 문제는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니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같은 극심한 양극화가 진행되고 평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니 북한과 같이 다 함께 평균적으로 빈곤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는가.

 

자유와 평등의 실현이 법과 제도로써 실제로 구현되어야 한다면 박애는 사람이 가진 도덕적인 이성이나 양심에 의해 실현되어야 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법으로 강제할 수 없는 것이다.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발현이 자연스러운데 반해 왜 우리나라의 재벌이나 정치인들에게서는 그런 것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인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오히려 일반 서민들보다 더  비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세금 탈루, 병역기피,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등은 가진 자들만의 점유물처럼 횡행하고 있다.

 

애국심이란 강요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나를 위해 일하고 내가 국가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애국심은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겨나는 법이다. 공산권의 몰락이 곧 사회주의의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매우 높고 행복지수가 높으며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도가 최상인 북유럽 국가들은 하나 같이 사회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낸 세금이 곧 자기들을 위해 쓰이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기꺼이 높은 세율의 세금을 내고 있으며 사회보장제도가 튼튼하게 잘 되어 있어 교육이 무상으로 이루어지고 실직을 해도 실업수당이 나오기에 커다란 위기 없이 재취업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게으르지도 않다. 학교에서는 경쟁을 가르치기보다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며 빌 게이츠나 주크버그처럼 엄청난 부자는 없어도 전 국민이 일 년에 한 달 정도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 있는 삶을 산다.

 

그들이 사회보장을 튼튼히 하는 것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사회안전망을 튼튼하게 갖춰놨더니 그런 살기 좋은 사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를 무한하게 보장하고 남이야 어떻게 되는 나만 배터지게 잘 먹고 잘 사는 게 최고라는 생각이나 추구가 결코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 한다는 전 국민적인 합의가 가능했기에 공동체의 행복을 위하여 개인의 권리를 기꺼이 양보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들은 먹고 사는 문제를 국가가 해결해주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 억지로 일하는 게 아니라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일한다. 우리나라의 일부 정치인들은 복지를 늘리면 국민이 게을러진다는 소리를 반복적으로 하는데 그런 사고방식이야말로 국민 개개인을 고귀한 인격을 갖춘 존재로 보는 게 아니라 아무 생각도 철학도 없는 노예로 보는 것 아닌가. 한 달에 이틀 쉬며 하루 열 두 시간 이상 식당에서 허리 한 번 필 여유도 없이 일을 해도 이 백 만원 가져가기도 쉽지 않은 게 그 사람이 게을러서인가? 허리가 굽은 노인이 하루 종일 폐지를 주워 고물상에 팔아 하루 만 원 벌기 쉽지 않은 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북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직업의 귀천이 없기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골라 하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공부를 하러 굳이 명문대학에 갈 필요가 없기에 입시지옥도 없다. 의사가 왜 소방관보다 많은 보수를 받아야 하며 교수가 왜 청소부보다 더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판검사가 왜 초등학교 교사보다 몇 배의 연봉을 받아야 하느냔 말이다. 학생들이 학교 졸업 후 자기의 진로를 선택하는데 자의 적성이나 그에 따른 능력 혹은 자아성취 가능 여부를 생각하기 보다는 어떤 직업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가에 따라 사람의 가치마저 순서가 매겨지게 되니 그래가지고서야 온 나라 온 국민이 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북유럽의 사회주의국가의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의사가 되고 사회정의를 확립하기 위하여 판검사가 되고 학문을 연구하는 게 좋아서 교수가 되지만 우리는 오로지 돈을 많이 벌기 위하여 의사가 되고 판검사가 되며 교수가 되려 하지 않던가. 관료는 관료대로 정치인인 정치인대로 국리민복 보다는 각 개인이나 자기의 이익을 보장해줄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으니 사람이 눈에 들어올 여유가 없다. 끝없는 사람들의 물욕을 자극하여 오로지 표나 얻으려는 포퓰리즘의 정책이 먹혀드는 건 후진국의 정치다.

 

모든 이데올로기나 법, 제도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이념에 종속되는 수단이 되어버리는 곳에 인간다운 삶은 설 자리가 없다. 우리가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나 신자유주의가 인간의 기본권마저 담보할 정도로  신성시된다면 우리는 그것의 가치에 대하여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사람의 행복이지 이념의 수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념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이념의 하위가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황금이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사람이 서로를 세워주며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실현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내가 얼마든지 더 가져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여 남겨두는 마음이 너와 나를 살리고 이 지구를 살리는 가장 빠른 길일 것이다. 자기의 것을 철저하고 영악하게 챙기는 사람이 지혜로운 것 같지만 기실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인간의 탐욕을 정당화하고 부추기는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의 위선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나라를 위하는 듯 공동체를 위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촛불의 힘으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적폐청산은 요원하기만 하다. 여전히 권력은 시장에게 있고 대기업의 영향력은 막강하여 그들의 전횡에 정부가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금만 공정하게 걷어도 모두가 고루 잘사는 사회가 될 것임에도 대기업과 언론 그리고 권력이 유착하여 서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세금 제대로 걷으면 대기업이 힘들어져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겁박을 한다. 노동자의 연봉이 삼천만원인데 대기업 임원의 연봉이 이십억이 넘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인가? 내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가져가고 있다면 그건 곧 누군가의 몫을 내가 차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돈만 많이 가지고 있을 뿐 올바른 가치관이나 삶의 철학이 없기에 우리나라의 재벌들 중에 존경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다. 그들을 더욱 천박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가진 돈 만을 부러워하며 그들의 삶이나 인격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작정 그들을 부러워하여 롤모델로 삼는 수준 낮은 민도의 영향도 없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제 혼자의 욕심 채우기에만 급급하여 탐욕스런 정치가를 뽑은 대가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너무나도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세상은 여전히 정의롭지 않고 사람들은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탐욕에 스스로를 내맡긴다. 세상이 그러하니 나도 그렇게 큰 물결에 휩쓸려 내려가듯 대세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옳은 일일까? 내 이웃이야 굶어죽든 맞아죽든 나만 괜찮으면 잘 사는 것인가? 혼자서 집을 수백 채를 가지고 있어도 맘이 편안한가? 나에게 월급 받는 사람은 노예 취급해도 되는 것일까? 가난한 아이들은 배 타고 수학여행을 가면 죽어도 싼 것인가? 해고된 노동자들은 굴뚝 위에서 농성하다 목매어 죽어도 되는 것인가?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개돼지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스스로의 존엄성을 포기한 사람은 개돼지 취급을 받는다. 만인의 몫을 혼자 차지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큰소리로 외쳐야 한다. 모든 것을 혼자 차지함으로 다른 사람을 짓밟고 군림하려는 악에 대하여 분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 스스로 존귀한 사람은 빈부에 상관없이 인격의 고귀함을 잃지 않는다. 악의 세력이 내미는 달콤한 미끼를 덥석 물지 않는다. 오로지 참되고 옳은 일 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강자에게 비굴하지 않고 약자를 업신여기지 않는다. 그게 곧 참 사람이요 그 마음에 하늘을 품은 사람이다. 그 하늘을 품은 사람이 곧 메시아요 세상은 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를 그리고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는 미래에 황금 갑옷을 입고 백마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초인이 아니다. 눈물겨운 삶의 현장에서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이 땅의 장삼이사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의 존엄을 깨닫고 내 앞과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존엄을 깨달아 인류보편의 가치인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하나씩 이루어나갈 때 어느 한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대동세상이 열릴 것이다. 우공이 산을 옮기듯(愚公移山)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치있는 일을 할 때, 너도 나도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각자 그러한 메시아가 될 수 있는 존귀한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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